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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여사

Park Chung Hee Presidential Museum
소녀시절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음 10월 14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덕유산 기슭 육종관씨와 이경령 여사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는 성실한 독농가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진 보수적인 토호였다. 한편으론 미신타파, 근대문명에 대한 깊은 동경과 신지식에의 민감한 반응,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기계류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또한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 이경령 여사도 후덕한 마음씨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며 큰살림을 해내는데 조금도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이경령 여사의 태몽은 ‘집마당으로 기어든 거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남달리 우애가 깊었던 형제는 오빠 육인수와 언니 육인순(72년 작고)여사, 동생 육예수 여사였다. 어릴 때부터 ‘마음 착한 교동집 작은아씨’로 이름이 나 있었던 육영수 여사는 진흙 속에 물들지 않은 군자의 기품을 지니고 있는 연꽃, 철따라 피어나는 꽃밭의 꽃들, 그리고 뒤뜰의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감나무 속에 묻혀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보냈다.

육영수 여사는 소녀 때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동생의 옷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육 여사는 다락에 가득 쌓인 현금관리를 맡았기도 했던 살림꾼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육 여사는 8세에 죽향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급우들은 모두 육 여사보다 한 두 살, 많으면 5, 6세 위였다. 제일 나이가 어렸고 키가 작은 육 여사는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비교적 말수가 적고, 온순했으며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육 여사는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부유한 가정이었으므로 학용품도 넉넉했다. 육 여사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연필이 없으면 거의 새것이나 다름이 없는 연필을 주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독차지했다. 공부가 끝나고 청소를 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청소를 했다. 책상을 반듯하게 정돈하거나 유리창에 손자국 하나 없이 꼼꼼하게 닦아 놓고서야 집에 가는 것이었다.

육 여사의 학교 성적은 45명중 언제나 5등 이내였다. 특별히 어느 한 과목에 치우치지도 않고 전 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좋았다. 죽향국민학교를 졸한 무렵 육 여사는 친구들에게 장차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말하기도 하여 그 착하고 아름다운 인품을 소녀시절부터 보여주었던 것이다.
배화학교시절

육영수 여사는 1938년 죽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고등여학교에 6대 1이라는 높은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충청도에서 온 학생으로는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육 여사는 시골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학해서 1학년 때부터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육 여사는 몸가짐이 늘 단정했다. 당시 여학생들은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주름이 한 번도 펴진 것을 볼 수 없었다. 특히 육 여사는 머리숱이 많았지만 항상 곱고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다. 성격이 차분한 육 여사는 늘 조용한 미소를 짓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다툰 적도 없었다.

너무나 순진하여 소풍을 가 노래를 시키면 숨어 버리고 마는 성품이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언행이 겸손하고 검소해서 육 여사가 옥천의 부잣집 딸이란 사실을 졸업할 때까지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육 여사는 웃어른의 말을 거역하는 일도 없었다. 졸업기념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 가지 못했다. 그러나 육 여사는 어른들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육 여사는 재봉과 수예에 뛰어나 전 학년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곧잘 ‘시집가서 잘 살겠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졸업을 하자 육 여사는 옥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옥천여학교에서 선생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이 왔다. 육 여사는 청을 받았을 때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였다. 매사에 조심하는 여사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학생들은 육 여사를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 학생들은 다정하고 친절한 그리고 상냥스런 육 여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인의 아내가 되어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영수 여사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 시절에 육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육본 정보국 제 1과장으로 소령이었던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곳은 영도다리 옆 조그마한 음식점에서였다. 육 여사의 이종 6촌 오빠이며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1년 후배이자 직속부관인 송재천씨의 중매로 만난 것이었다. 육 여사는 박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인상에서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려자로서의 미더움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대의 뜻을 비쳤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군인에게, 그것도 전쟁 중의 군인에게 귀한 딸을 시집보내기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결국 1950년 12월 12일, 육 여사는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박 대통령은 갓 창설된 9사단의 참모장으로 중령이었고 나이 34세였다. 육 여사는 26세였다. 결혼식 주례에는 그때 대구 시장이었던 허억씨였다. 경북지사 조재천씨와 모교인 대구사범학교 재구 동창회에서 화환을 보내왔다. 하객으로는 김재춘씨, 왕학수(부산일보사장)씨, 김종면(서울신문사감사)씨, 박영옥(김종필 국회의원 부인)여사 등 친척을 비롯하여 전국 대구사범학교 동창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들러리는 신랑 측이 대구사범학교 동창인 두용규씨와 전우였던 최호씨였고, 신부 측은 김재춘씨의 부인 장봉희 여사와 친동생인 육예수 여사가 섰다.

육 여사는 대구 시내의 현 관광 호텔자리에 있었던 조그마한 한옥을 전세 내어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살림은 퍽 어려웠다. 육 여사는 친정이 부자였지만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절약과 저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봉급에서 한푼 두푼 떼어 저금을 했다. 당시 군인 장교들에게 나오던 쌀 배급을 아껴 모아 적금을 넣기도 했다. 그 돈으로 작은 구멍가게를 내어 살림을 보태었다. 또 세퍼트를 사육하기도 했다. 이렇게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던 육 여사는 마침내 내집을 마련했다. 결혼 6년이 넘은 56년 봄이었다.

서울 신당동에 20평짜리 조그마한 양옥을 장만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낡아서 벽이나 부뚜막을 손질해야 했다. 하지만 육 여사는 이 첫 내 집 마련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청와대시절

1963년 12월 17일. 육 여사 38세 때 제3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다. 육 여사는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 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 첫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많은 사람을 만나 시중에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끝으로 청와대의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얘기와 관심사를 토대로 대통령께 직접 건의하여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육 여사는 사회 각층으로부터의 들은 얘기를 그 나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 박 대통령에게 직언했으며, 또한 솔직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박 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나는 정권 야욕도 조직도 없는 사람’이라는 슬기로운 농으로써 우회 작전을 펴기도 했다.

육 여사는 새벽 6시부터 밤 1시가 넘을 때까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늘 고된 하루였다. 자녀들이 등교하고 난 7시 반부터 조반을 들기까지의 1시간 동안은 조간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대통령의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메모를 하거나 신문에 줄을 치는 일이었다.

9시경 식사가 끝나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면 육 여사의 민원처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50여 통이나 되는 서신을 일일이 읽어보고는 정성껏 답장을 해주기도 하고 좋은 일도 베풀어 주었다. 그런 바쁜 틈틈이 가족의 식단을 짜거나 옷가지를 매만지거나 실내장식에 마음을 쓰는 등 생활 주위의 정리를 했다. 그러다보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박 대통령과 함께 또는 혼자서 외부 손님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었다.

오후는 접견시간이었다. 외국의 빈객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 각 단체의 간부나 회원들, 벽촌의 어린이들, 새마을 지도자들, 일반서민층 주부에 이르기까지 접견, 그 수많은 손님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는 공부시간이었다. 여러 전문 학자들을 초빙하여 세계사·문화사·종교사·역사·지리·철학·고고학·경제학·교육학·외교·정치사·시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공부를 했다.

6시가 넘으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나누었다. 불가피한 일로 박 대통령이 불참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전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때로는 예고 없이 허물없는 손님이 동석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석간신문을 살피고 라디오, 텔레비전의 뉴스를 체크하고, 자녀들과의 대화, 독서, 오후에 도착된 편지를 읽는 등 새벽 1시가 될 때까지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보통의 육 여사의 일과이지만 봉사활동, 지방시찰 등의 일이 겹칠 때는 눈코 뜰 새가 없게 된다.

한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무엇 하나 변변하게 갖춰진 것이 없던 시기에 선물포장을 제대로 하기 위해 고심하고, 한국적 미각의 요리를 마련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하고, 외빈의 편안한 방문을 위해서, ‘진실은 누구에게나 통하며 신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믿음을 갖게 한다.’ 고 말하며 따뜻한 정과 창의적인 기지를 발휘한 육 여사는 그야말로 알뜰한 주부, 슬기로운 퍼스트레이디로서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외국을 방문할 때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할 때에도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우리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널리 인식시킬 수 있었고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퍼스트레이디’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분주한 생활을 보다 못해 주위에서 너무 고되지 않느냐고 얘기하면 육 여사는 서슴지 않고 ‘내 생활신조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 이라면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마치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과 같은 기분이 든다’ 고 말했다. 언제나 차분한 여유와 부드러운 미소, 유쾌한 위트와 유머가 육 여사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자상한 아내/평범한 학부모

육 여사는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란 적은 월급이라도 불평 없이 살림을 꾸려가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누구에게나 말했다. 이것은 신혼 초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아무 불만 없이 무난하게 꾸려나갔던 체험으로 얻은 결론이었다. 육 여사는 철저하게 이러한 내조 생활을 해 왔다. 부엌살림은 일반 가정과 차이 없는 혼식과 분식이었고 육류보다는 채식이었다.

평생 부부싸움 없는 내외간이었지만 육 여사가 박 대통령에게 불만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박 대통령이 옷에 대하여 너무도 무관심해서였다. 넓은 넥타이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 육 여사는 넓고 산뜻한 넥타이를 권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 여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육 여사는 오래된 넥타이를 슬그머니 감추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육 여사에 대한 애정은 은은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에게 결혼 이후 한 번도 생일 선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또 박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동안 닷새가 멀다고 편지를 띄웠다. 육 여사는 3일 만에 한 번씩 일기 쓰는 식의 답장을 보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깊은 밤 혼자서 일기를 써나가듯 편지를 쓰다보면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다 잊어버린 채 가정주부가 갖는 소박한 행복감에 가득히 젖어들곤 했다.

교육을 마치고 귀국한 박 대통령은 육 여사의 편지를 받은 순서대로 스크랩을 하여 육 여사로 하여금 감격하게 했다. 육 여사가 박 대통령에 대한 내조에 못지않게 염려했고 힘을 기울였던 일이 자녀교육이었다. 육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이기에 앞서 세 자녀 근혜, 근영과 지만군의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였다. 여사는 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은 영부인이란 칭호를 절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다른 부모 못지않은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바쁜 시간을 틈내 자녀들의 학교를 곧잘 찾은 육 여사는 언제나 정문 밖에서부터 혼자 걸어 학교로 들어가곤 했다. 지만군이 청운국민학교 6학년 때 초겨울이었다. 육 여사는 느닷없이 학교를 방문하여 지만군이 수업을 받는 3층 교실을 찾아가 추운 복도에서 무려 30분 동안을 혼자서 기다리기도 했다.

담임선생은 지만군이 숙제를 해 오지 않은 날 손바닥을 때렸다. 이를 안 육 여사는 저녁에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 잘하셨습니다. 숙제를 안 해 올 때는 사정없이 꾸짖어 주십시오. 어머니로서 미처 살피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사과를 했다.

또한 학교에 가는 날이면 방과 후 학교의 교실을 둘러보고 창문의 커튼을 거두어 손수 빨기도 했다. 육 여사는 비록 학교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학교생활과 학업 성적을 자세히 묻는 자상한 학부모였다. 육 여사는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여사는 ‘어른들 틈에서 지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친구가 없을 것이 걱정이 된다’고 담임선생들에게 이따끔씩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육 여사는 박 대통령이 청와대를 비운 사이를 이용하여 자녀들의 친구를 초대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지만군이 졸업반일 때 같은 학년 친구 전원(1천1백 명)을 불러 함께 잔디밭에서 뛰어 놀았다. 이때 육 여사가 입고 나온 남색 치맛자락은 개구쟁이들의 손때가 묻어 까맣게 변했지만 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육 여사는 인자하면서도 엄한 어머니였다. 특히 자녀들이 특권 의식을 가지지 않을까 항상 염려했다.

여사는 자녀들에게 ‘서민처럼 생활을 하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자녀들의 통학 때에는 자가용을 태우지 않도록 고집을 했다. 근혜양이 원효로 4가에 있는 성심여자중학교를 통학할 때 꼬박 전차나 버스로 다녔다. 이런 육 여사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어머니를 본받아 근혜양은 스타킹까지 꿰매신고 다닐 정도였다. 근혜양이 대학을 진학할 때, 육 여사는 될 수 있으면 여성답게 인문계 학과(사학 전공)를 택하길 바랐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업 현실에서 전자산업이라는 분야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가 크고, 전자산업 분야에 참여해 보고자하는 딸의 생산적인 의욕과 주장을 존중해 대신 힘과 용기가 되어 주었다.

육 여사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지고 온 시험 답안지를 비롯하여 학교 숙제와 그림 공작물, 작문, 성적표를 모두 모아 놓았다. 그것들을 자녀들이 결혼하게 될 때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과 함께 며느리와 사위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늘진 곳을 찾아

육 여사는 <일하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이 겨레 어느 한구석의 불행에도 무심치 않았던 여사였다.

육 여사는 양지회 설립을 비롯해서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의 창간, 서울 남산의 어린이회관, 어린이 대공원, 보광동의 정수직업훈련원, 서울대 기숙사인 정영사,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여성회관의 건립 등등에 이르기까지 각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양로원과 고아원은 육 여사의 따뜻한 손길을 받았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도 육 여사의 방문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육 여사의 활동은 신문팔이 소년, 낙도 어린이, 영세 근로자, 나병환자, 윤락여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쳤다.

71년 9월 육 여사가 익산군의 성지나환자촌을 방문하여 뭉그러진 나병 환자들의 손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감싸 쥐었을 때 환자촌은 갑자기 울음바다로 변했던 일도 있었다. 박 대통령은 서거 다음날인 16일 밤, 청와대 본관 빈소에서 밤샘을 하며 ‘참 저 사람은 그토록 매사에 지성일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저 사람이 나병환자들을 위문하고 일일이 악수를 한 뒤 그 손을 나한테 그대로 내민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선뜻 그 손을 잡기까지 했다’ 고 회고를 하여, 육 여사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었다.

육 여사는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을 지극히 대했다. 박 대통령께 선물 들어온 술을 몰래 노인들에게 보내 주기도 했다. 또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뛰놀고 배울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 육 여사는 70년 7월 어린이회관을 낙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육 여사는 문화계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었다.

가난한 시인들에게 시집을 낼 수 있도록 후원하여 시집이 56권이나 간행되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천지

29회 광복절을 앞두고 전국은 서서히 장마 전선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에는 서울에 0.3mm의 이슬비가 내렸을 뿐 동녘엔 구름이 걷히고 찔끔거리던 하늘도 갰다.

15일 10시 20분 육 여사가 범인의 흉탄을 맞은 지 2분 뒤인 10시 22분부터 하늘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 비는 육 여사가 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기 시작한 10시 40분까지 내렸다. 이때의 강우량이 0.2mm였다.

육 여사가 수술을 받기 시작하자 바로 그 순간부터 하늘도 슬픔을 억누르고 쾌유를 비는 듯 서울 지방에선 비가 내리지 않았다. 수술을 시작한 지 30분이 흘렀다. 그리고 또 10분이 흘렀다. 수술을 맡은 의사들의 얼굴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하늘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1시 20분부터 좍좍 비를 쏟아냈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육 여사가 서거한 7시까지 28.5mm의 비가 내렸다.

오후 7시, 육 여사가 운명을 했다. 이 순간 하늘에 이변이 일어났다. 비가 그치고 흑회색으로 흐려있던 하늘이 갑자기 오렌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건물의 벽도, 창문도, 온통 오렌지빛이었다.

이 오렌지빛은 약 30분 동안 서울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육 여사의 운구가 서울대 부속병원을 떠나 청와대에 도착하자 그 빛은 차차 엷어져 갔다.

이 빛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혼의 세계에서 육 여사의 성스런 영혼을 맞기 위한 극락세계의 주황색 가교가 드리워진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