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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육영수 여사 세가지 에피소드

  • 조선일보
  • 2019.11.29

68년 여름은 호남 일대에 한발이 심했다. 광주에는 식수조차 어려웠다 육영수 여사는 도지사 관저에 조석으로 전화를 걸어 마음이 불안하여 숭늉도 마음놓고 마 실 수 없으며 세수도 못하겠다면서 안타까와 하였다. 그러다가 직접 광주로 나들이를 하였다. 지사부인의 안내로 가장 한발이 심한 나주 공산면 화성리 마을로 갔다. 논바닥이 발이 빠질 정도로 쩡쩡 갈라져 있었다. 이 정경을 보자 여사는 마중나온 마을사람들에게 눈물을 글썽 거리며 정부에서 굶기기야 하겠느냐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리고 저만큼 논구석 말라버린 웅 덩이에 걸려 있는 양수기를 직접 돌려보며 혼자 울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당시 수행하였던 지사부인에게서 나는 무슨 기회에 듣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사가 돌아가신 후 동작동 묘지에 참배자의 수가 한해동안 4백50 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루 1만명이 넘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폭넓게 국민의 가슴에 깊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 연유의 하나가 영부인으로서 육여 사의 생활이 위에서 작은 예를 들었지만 국민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아픔을 자신 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풍부하고 순수한 인간애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국민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여사가 구라사업을 폭넓게 펼치고 나환자와 악수를 하게된 사실은 널리 퍼져있는 누구나 아 는 사실의 하나이다. 71년 겨울이었다. 전남 익산군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으로 시찰가는 길에 여사는 나병을 앓 은 경력이 있는 시인 한하운씨를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헤리콥터 안에서 준비해 온 귤을 한씨에게 권하였다. '이거, 하나 들어보실래요? ' 여사가 권하는 말에 한씨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놀라버린 것이다. 귤껍질을 깨끗하게 까서 주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모지라진 그의 사정을 미리 살펴 귤을 까주는 여사의 배려에 감 격하였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여사의 생활신념. 이와 같은 생활신념이 대인관계에서는 섬세한 애 정과 성의로 그분을 만나는 사람마다 흐뭇한 인정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셋째, 여사는 한때 과로로 말미암아 가벼운 불면증으로 몇 달 고생을 한 일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측근에서 수면제를 복용하도록 권하였다. '주무실 때, 수면제 한 봉지만 드시면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다. 꼭 드시도록 하세요.' '그래요.' 그러나 여사는 끝내 수면제는 복용하지 않고, 가벼운 불면증을 극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잠 이 오지 않는 괴로운 자리에서도 수면제를 들지 않는 이유가 놀라운 것이다. 수면제를 들고 늦잠을 자게 되면 자녀들 앞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염 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육여사는 자녀교육에 대하여 무척 신경을 쓴 분이다. 그러나 그분의 교육방침 중 으뜸이 되는 것은 자녀들을 가르치기보다는 부모의 생활이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 여 평생 자녀들 앞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실행하였던 것이 다.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는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신빙할 수 있는 소 스를 통하여 들은 것이다. 이 두 서너가지 짧은 일화를 가지고 육여사의 전모를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분의 생활의 일단은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바라는 대통 령 영부인으로서 거의 충분한 이미지를 심어준 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75.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