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6·25 25주년
-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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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25주년
1975년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일) 새벽4시, 155마일 38선 전선에서 북한 공산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개시, 민족사상 가장 처절한 혈타가 전개되었다.
불의의 기습공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침 징후를 약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친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 수뇌, 정부 당국, 미국 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작전판단서는 전쟁이 발발 후
포로와 적 문서에 의하여 또는 귀순자들의 제보에 의하여 너무나 정확하게도 적중하였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그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 시대에 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의 정세는 흡사 6·25 전후와 비슷하다.
우리 세대에 또다시 이러한 과오를 범한다면
후손들에게 죄를 짓고 조상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전 국민이 시국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총력안보 태세를 철통같이 다져서 추호의 허도 없이
주국을 수호하는 데 심혈을 경주해야 할 때다.
1950년 6월 25일에 나는 고향 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드리고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담화를 하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1명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서 보낸 긴급 전보였다.
“금조(今朝) 미명(未明)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 3개는 적과 교전 중, 급히 귀경”의 내용이었다.
새벽 4시에 38선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12시까지 시골 동네에서는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네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한 집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하다.
경부선 상행열차에 병력을 만재(灣載)한 군용열차가 계속 북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 야간 북행 열차를 탔으나 군 병력 전송 관계로 도중이나
역에서 몇 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가 불안에 싸여 있고
위장을 한 군용차량들이 최대한도로 거리를 질주하고
서울의 거리에는 살기가 감돌기만 하였다.
용산 육본 벙커 내에 있는 작전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주야 꼬박 새운 작전국 정보국 장병들은
잠을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왕좌왕 전화 통화 관계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고 소란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