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정신

  • 홈으로
  • > 학술연구
  • > 박정희정신
제목 지금은 박정희를 재평가해야 할때 ( 2018-02-07 )

[특집] 박정희 탄생 100돌의 의미 

 지금은 박정희를 재평가해야 할때

 

박정희는 국가 개조와 사회변혁을 진두지휘한 혁명 대통령, 조국 근대화를 견인한 부국 대통령,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무력화시킨 안보 대통령,백년대계를 설계한 교육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금, 오직 자신의 영달에만 눈이 먼 정치인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

 

 

  시대는 영웅을 낳는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의 의미는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가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 그리고 시대적 소명에 부응해 그가 이룩한 역사적 업적과의 관련성 속에서 재조명될 수 있다. 이를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그의 탄생 배경부터 살펴보자.
  박 대통령은 일제 식민 통치 기간,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직후인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 박정희가 처한 환경은 한마디로 불우한 것이었다.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형과 누나들 틈바구니 속에서 별로 대접받 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꾸면서 낭만을 잃지 않으며 살았다.
  그는 청년이 되면서 정든 고향, ‘극심한 궁핍’의 농촌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과 도약의 기회’를 찾아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간직했던 큰 포부를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3년간 문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내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박정희의 ‘개척자’적인 인생철학과 진취적인 기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박정희를 한평생 붙잡아두기에 소학교는 너무나 작고 좁은 공간이었다.
  이후 인간 박정희의 생애는 자신의 ‘존재구속성(Seinsgebunden heit)’을 극복하려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4가지 관점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우리 국민 속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고, 또 앞으로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단편적이고 불충분할 수도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혁명’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국가 개조와 사회변혁을 진두지휘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와 제2공화국에서 나타난 극도의 부패와 정치적 난맥상을 보고 우리나라가 이래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3년간의 6·25 전쟁을 겪고도 우리 국민의 정신상태가 너무나도 해이하다고 믿은 것 같다.

실제로도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한국의 상황은 범국민적인 정신혁명이 요구되었고, 사회 전 분야에서의 대수술이 절실했던 게사실이었다. 이런 역사적 현실에서 5·16의 씨앗이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한 몸을 던져 이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혁명적 선택,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5·16은 군사적인 거사(擧事)였지만,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현대사의 큰 획을 이룬 사건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둘째, ‘부국(富國)’ 대통령이었다. 조국의 근대화 및 산업화를 기획하고 견인한 인물이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국민경제의 기초가 부실했다. 외국에 수출하는 상품이 거의 없었고, 우리 국민한 사람이 1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1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따라서 누대(累代)에 걸쳐 계속되어 온 가난과 저성장을 떨쳐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정책 과제로 대두됐다.
이를 위해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함으로써 후진국형 저발전에서 탈출하기 위한 경제도약의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 광부·간호사 서독파견, 월남전 파병, 중동의 건설현장 진출 등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외교와 경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실기(失機)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일 수교와 월남전 파병은 외교와 경제, 나아가 안보적 관점에서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이를 통해 종잣돈을 마련했고, 경제 발전과 도약의 계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1960년 1인당 GNP 80달러에서 1980년 1,700달러로 20배 이상 수직 상승한 데는 그의 통찰력과 추진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 발전 동력이 된 새마을 정신


 

  박정희는 농촌 주민들의 빈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도 한번 잘 아보세”라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바뀌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돼버렸던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팍팍했던 지역주민들의 삶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새마을운동은 풀뿌리 수준에서 민초들의 어려운 삶을 보듬고 어려운 농촌경제를 살리는 ‘민생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인 ‘근면·자조·협동’은 농촌경제 활성화는 물론, 국가 발전과 번영에도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새마을운동은 국민들의 지지와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제3세계에 수출되는 모범적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박정희의 근대화는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나라사랑 고취, 허례허식의 근절, 미신 타파 등 정신적 근대화를 아울러 도모했다.
  셋째, ‘안보’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했던 기간은 북한이 경제·외교·군사 면에서 대체로 대남 우위에 있었고 대한민국이 안보적으로 매우 취약한 시기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우선 한미동맹 강화에 주력했다. 1978년 11월 한미연합군사령부(Korea-US Combined Forces Command)를 설치하여 최강의 연합방위체제를 수립하는 한편,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에서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를 정례적으로 개최했다.
  또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세우며 국방과학기술의 발전과 방위산업의 진흥에 매진했다. 이 같은 노력은 우리의 국방을 미국이란 외세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자주의식의 발로였다. 다른 한편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대공태세 완비를 통해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무력화시키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넷째, ‘교육’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백년대계로서의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 특히 국가발전에 필요한 각 분야의 인재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교육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교육의 철학과 방향, 정신적 가치를 정립하는 일은 교육정책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박정희가 제정한 ‘국민교육헌장’은 한국 교육의 역사에서 이룩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읽어 보아도 ‘국민교육헌장’은 명문 중의 명문이다. 또 국민교육헌장으로서 담아내야 할 내용을 두루 다 갖추고 있다.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다. 하지만 일부에서 다소 악의적으로 ‘국민교육헌장’을 흠집 내는 태도를 보이는 데는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의 3가지 리더십


 

  박정희의 리더십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나를 따르라’는 선봉장의 리더십이다. 이와 관련하여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정신(Can Do Spirit)을 설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지금 시각에서 볼 때는 다소 권위주의적일 수도 있지만,도약과 발전이 시급하고 절실했던 당시로서는 그와 같은 리더십이 필요했었던 게 사실이다.
  둘째는 ‘위국위민(爲國爲民)’의 리더십이다. 박 대통령이 제시한조국 근대화나 민족중흥의 정책방향은 모두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지향(orientation)과 통했다. 박정희는 언제나 ‘국리민복’을 먼저 생각했고, 또 이를 앞세우는 정책을 펼쳤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새마을운동, 자주국방의 실현과 한일 국교정상화를 비롯한 외교적 지평의 확대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 모두가 대한민국의 국익과 국민적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들의 건강권, 진료권의 보장을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의료보험이라는 가능한 것부터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모색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농촌을 방문해서 모내기에 참여했고, 농민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박정희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위민의 자세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는 ‘뚝심’의 리더십이다. 그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믿으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물리치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과단성과 추진력이야말로 박정희에게 특유한 천부적 자질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와 월남전 파병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었는가를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박정희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당시 야당과 반대진영은 경부 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해서도 극렬하게 반발했다. 박 대통령이 그러한 입장에 끌려 다니며 우왕좌왕했다면 십중팔구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우리가 존경하는 박정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올바른 길이고 가야할 길이라고 믿으면 한번 수립한 국가정책을 뚝심을 가지고 일관되게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고, 반대파를 설득해 가면서 정책을 추진했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박 대통령의 공(功)을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박정희를 재평가해야 할 때


 

  한마디로 박정희는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로 애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대’를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경제개발과 압축 성장을 ‘개발독재’ 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독재를 한다고 해서 모두 국민을 잘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은 1960년 한국보다 4배가량 잘 살았지만, 오랜 기간의 독재와 그 이후 민주화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대를 이은 독재’는 또 무엇을 말하는가. ‘한강의 기적’은 박 대통령이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국민의 역량과 에너지를 한데로 결집,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만들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 대통령은 장기 집권하는 동안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기도 했다.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발동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강력한 반공 정책은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무력화시키긴 했지만, 인권침해 등 적지 않은 후유증을 초래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의 잘못만 부각시키고 경제성장과 국가 안보 등에 기여한 업적과 공로에 눈감는 태도는 부적절하다.
  작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눈박이 역사관’으로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닐터이다. 그 대신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냉철하게 평가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는 일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한 번제물이 되겠다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다. 모든 비난과 비판은 홀로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인가? 우리 사회는 그동안 박정희의 진정성을 너무 몰라주었던 것은 아닐까?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즈음해서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은 박정희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나라에는 박정희와 같이 책임지는 지도자,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 바라보고 멸사봉공하는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자기영달에만 눈이 먼 정치 지도자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구국의 영웅 박정희를 그리워하며, 또 제2, 제3의 박정희의 출현을 대망하는 것이다.

원문수록 박정희정신 제6호 102p-110p
목록
최상단으로 바로가기